[리뷰]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느낀 점을 적어봅니다. 이번 글은 특히 두서가 없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두서 없음을 미리 고백하오리다
간만에 엄청 어려운 책을 읽었습니다. 철학책 치곤 쉽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절레절레... 카뮈는 꽤 똑똑한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으리라 상정한 것 같습니다. 일단 당대까지 유명했던 역사적 사건과 철학자들을 잘 알고 있어야 책의 이해를 겨우겨우 발끝으로 따라갑니다. 사드, 헤겔, 니체, 마르크스, 하이데거 등 철학자들까지 총출동 합니다. 나무위키와 유튜브로 사상을 겉핥기라도 했습니다.
어렸을 땐 종종 어려운 책을 읽었습니다. 그땐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경제학이나 과학 같은 교양서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한때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학 책을 열심히 봤습니다. 오늘날, 나 자신이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단서를 조금이나마 얻기 위해 철학 책을 집어듭니다. 맨땅에 헤딩.
필자가 이해한... 이라는 구질구질한 말을 글에서 자꾸 덧붙이는 이유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감이 없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럴 때도 있는 법이죠. 자신감 있게 말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더욱 찾아보고 내공을 키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습니다. 어떻게 보면 반항입니다. 글을 잘 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가하는 속박에 대한 반항! 이 블로그가 이렇게 생겨먹었지, 그렇다고 앞으로 그렇게 생겨먹으리란 법은 없잖아! 라면서 하는 반항. 그래서 이 글은 다소 두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책의 구성
민음사라는 출판사만 보고선 ≪이방인≫ 과 같은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죠? 철학 에세이라고는 하는데, 그냥 철학서입니다.
책의 구성을 먼저 살펴봅니다. 책에서 유명한 사건과 철학자들이 주구장창 나오는 이유는 카뮈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당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사상들을 하나하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도라는 분이 유튜브에서 말씀하시기로는, 그런 철학자들의 사상을 기가 막히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진짜로 잘 모르겠다는 뜻) 책의 초중반 까지는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사람들과 사상에 집중합니다. 그 이후에는 헤겔과 마르크스 등의 시대를 거칩니다. 자연주의, 허무주의, 니힐리즘(염세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을 스쳐 지나가며 카뮈는 그 사상들에겐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본격적인 주장은 앞부분과 뒷부분에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주인과 노예를 비유로 하여 개괄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설명, 그리고 최후반에 카뮈가 글을 쓸 당시의 최신 사상들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자신의 담론을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역사를 해체하는 작업입니다.
형이상학. 제가 이해한 형이상학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일에는 전혀 관심없고 오로지 머릿속으로 논리만 치밀하게 전개하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카뮈는 이 단어를 좀 싫어한 거 같습니다. 어떻게 현실의 일과 분리할 수 있냐고 주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효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풀어보겠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에서 학문으로 분류받지 않은 모든 영역은 철학으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철학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모든 학문들을 퉁쳐서 철학이라고 부른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학문이 발달하고 자신만의 방법론을 구축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점점 정교해졌습니다. 그에 따라 철학은 과학, 수학, 생물학, 뇌과학, 심리학, 경제학 등등 다른 학문에 역할을 넘겨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기가 막히게 설명합니다. 굉장히 역동적인 느낌입니다. 가만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하고 논리를 보여주기도 하고 직관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통찰이란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에게 접촉합니다. 그 경험을 필자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통찰의 형태는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평소에 전혀 관심 없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에도, 직장 동료와 새로운 대화 주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통찰은 성큼 다가옵니다. 거기에 철학이 깔려 있다고 믿습니다.
비집고 들어오기
자기 자신의 소스코드를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할 때, 어떤 기인이 빈 코드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아도 콰인의 정의를 만족하긴 한다. 실행이 가능하다면. 이 '빈 코드 콰인'은 1994년 International Obfuscated C Code Contest (IOCCC)에서 "최악의 규정 악용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은 "이 코드는 유효한 C 코드가 아니지만 유효하지 않은 C 코드도 아니다"라는 알쏭달쏭한 평을 했다(...)
빈 코드는 정의를 기묘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카뮈 또한 기묘하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사실 이건 분위기를 많이 타는 말입니다. 뭔 말이냐 하면은 다들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니 필자도 그렇게 이야기할 뿐이란 겁니다.) 생쥐스트 라는 인물은 프랑스 혁명기의 분위기 속에서도 더욱 광기어린 과격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뮈는 생쥐스트가 처형되던 때에 보여준 침묵에 주목합니다. 살인이란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라는 걸 몸소 보여준다면서요. 그렇다고 합니다.
모순적인.
모순이란 무엇일까요? 말이 안 된다, 모순이다 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뒤엎는 것입니다. 내로남불!
카뮈가 이야기하는 반항이란 인간의 연대와 상호 교류를 준거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노예와 주인 모두 사람이고, 노예가 주인을 죽인다면 살인자는 인간 공동체를 이야기할 권리가 없어집니다. 주인 또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되기 때문이지요. 주인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모순입니다. 해당 수단을 써야 목표를 이룰 수 있지만, 동시에 목표를 박탈당한다니. 카뮈는 살인자 또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조치를 제시합니다.
자유와 의무의 관계 또한 곱씹을만 합니다. 자유란 뭘 해도 괜찮다! 라는 의지겠지요. 그렇다면 자유에겐 의무가 없는 것일까요? 자유만 있다면 개개인의 자유가 부딪치는 지점에서 살인 또는 자살과 같은 가혹한 결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의무는 자유를 제한합니다. 의무란 목적이 있다는 걸 뜻합니다. 그 형태는 다양합니다. 법, 신, 전체주의, 역사,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현저하게 작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자유가 박탈된 채 일체의 모순을 없애려는 자정작용 속에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어떤 길로 가도 사람은 희생되어야 할까요?
카뮈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반항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건 사고의 틀을 제한합니다. 조금 더 고차원으로 올라가봅시다. 자유와 의무가 서로 이율배반적인 관계가 아닌 상태.
시지프 신화라는 게 있습니다. 신에게 평생 벌을 받았다 이겁니다. 어마무시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올려야 하는데, 올리자마자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집니다. 시지프는 다시 돌을 굴려야 합니다. 무한 반복 벌입니다. 우선 이러한 시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시련이 존재하는지 부터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 카뮈는 반항을 제시합니다.
카뮈가 그랬는지 혹자가 그랬는지 기억이 뚜렷하지 않습니다만, 바위를 기꺼이 계속해서 굴려내고 그 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고통을 즐기고 자부심까지 느낀다면, 그 벌을 준 신은 약오를 것이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반항이다!
만약 반항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신을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다른 신이 나타날 뿐입니다. 돌 굴리기를 피하고 싶다면 자살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면 기력이 다할 때까지 수동적으로 살며 고통 속에서 죽어갈 겁니다.
금방 자유와 의무가 서로 화합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자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돌을 굴리지 않을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은 자살 밖에 없는데, 그 이후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사람마다 주어진 커다란 돌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람들마다 분명 공유하고 있는 가치들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부족하지 않은 엄마 아빠 되기 등등... 그래서 반항하는 것은 곧 인류애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주인-노예 관계를 제외하고, 커다란 사건을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나왔던 현실적 예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 결성입니다. (어느 노동조합인지도 기억이 안남) 노동조합으로 누구든 죽이지 않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실제로 성과도 있었다고 합니다. 노동조합의 형태로 내세운 반항. 그리고 이 때 가장 효율적이라고 했습니다.
효율. 효율이란 무엇일까요?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본다면 효율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방향의 정당성은 조금 더 나중에 논의합시다. 노동조합으로 빗댄 "반항"은 성과가 확실했다는 겁니다. 본인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곧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길이었을 겁니다. 전체주의처럼 너무 먼 북극성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당장의 눈 앞에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맞서 싸운 것.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예시들을 책에서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 이유는 아시죠? 그냥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후암... 문학적 표현도 좋기는 한데...
이중성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중성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더 곱씹어보게 되었어요. 무엇이 있다/없다 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많은 맥락이 포함될 수 있음을요. 정확히 표현은 못하겠지만, 제 언어로 풀어서 이야기한다면은!!
테이블 위에 사과가 없다
라고 한다면, 이는 충분해 보입니다. 굳이 다른 맥락을 더한다면, 테이블 위에 어떤 다른 물건이 있을지 모른다, 테이블 위가 텅텅 비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함께 암시하는 정도지요. 만약 그림자가 없다
라고 한다면, 이는 좀 더 강력한 의미를 가집니다. 빛이 없다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물체는 있다고 칠게요) 빛과 그림자는 서로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더 정확히 본다면 본질적인 하나의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이 두 가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자살하든가 모두를 죽이든가
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 또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유와 의무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중성을 모두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일은 또 다르겠습니다. 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끝.
뭉뚱거림
이제 한국에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으쌰으쌰한다기 보다 개인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그에 따라 "저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정답은 없다 라고 하는 격언도 아주 흔해졌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걸까요?
책임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인생의 방향이 어떻게 되시나요
글쎄요. 사실 이 책이 필자의 방향에 대해서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카뮈는 좀 더 인생이라는 것을 거시적인 시점에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적 질문보다 삶의 의미와 관련된 담론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삶의 이유가 없더라도 그냥 살아갑니다. 숨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굳이 캐낼 이유도 없죠. 필자에겐 의미가 큰 질문이 아닌가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후후… 필자… 나름대로 저항적인 인간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제 행동의 정당성을 굉장히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행복을 어떻게 느낄 것인가 라는 건 다른 문제인 거 같아요. 마땅히 돌을 굴릴 수 있는 충분한 마음 근력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사상을 완전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돌을 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과 접하기 전엔 좀 더 미시적인 시각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좀 아쉬웠습니다. 필자는 제자리걸음 좀 오랫동안 씨게 했습니다. 언제까지 제자리걸음 하는 기분일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