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록으로 이동

봄가을 블로그

2022.10.02.

[리뷰] 슬픔이여 안녕

본 리뷰는 스포가 있습니다.

슬픔이여 안녕 표지
슬픔이여 안녕 표지

친구에게 책을 선물받았다. 평소에 자주 연락하진 않지만, 생일이 나와 하루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친구이다. 내 생일쯤 되면 희멀건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떠오르는 생일이라, 그냥 안부 인사 정도 수준의 선물을 준다. 반면 이 친구는 선물에 의미를 두는 태도가 몸에 한껏 배여있는지, 뻔하지 않으면서도 부담스럽지도 않으면서도 적절한 선물을 잘 주는 것 같다. 소설을 선물로 받은 건 인생에서 처음이다.

평소에 소설을 잘 읽는 건 아니지만 몇몇 소설이 갑자기 인생에 등장하곤 한다. 그럴 때 만난 소설들은 내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느낌으로 이야기하자면,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글자, 단어, 문장, 문단으로 어떻게 이런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내가 못하는 것들이다. 멋지다! 이 소설도 멋진 소설의 반열에 당당히 들었다.


주인공 세실. 10대 후반 쯤 되는 여성이다. 세실은 아버지와 둘이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는 부류이고, 그런 아버지를 세실은 사랑한다. 아버지와 함께 한, 자유롭고 낙천적이고 즐거움을 향유하는 삶을 사랑한다. 아버지가 여러 여자들을 사귀어왔던 것도 알고 있지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 익숙치 않을진 몰라도.

그런데 이런 세실과 아버지의 삶에 안이라는 인물이 불쑥 들어왔다. 안은 즐거운 삶이라는 것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도덕적이고 올바르고 경직되어 있으며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 넘친다. 아버지는 안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할 결심을 했는데, 이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그만둬버리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세실은 청천벽력이었다.

이에 세실은 기가 막힌 묘수 하나를 떠올린다. 바로 아버지의 직전 여친이었던 육감적인 매력을 지닌 엘자와, 자신의 썸남인 시릴을 시켜 둘이 서로 꽁냥거리도록 연인 연극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아버지에게 노출시켜, 아버지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그렇게 되면 안과 갈등을 빚을 것이며, 둘은 갈라질 것이고, 세실은 즐거운 삶을 성공적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철두철미하고 품위를 중요시하던 안은, 아버지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경향성을 발견했다. 나는 그 소설 특유의 표현력을 눈여겨본다. 내가 어렸을 때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곤혹을 치른 적이 많아서 그런건지, 여하튼 나는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마음 상태를 표현할 때 글 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겉으로 드러난 요소, 즉 배우들의 열연과 미장센 등으로 인물의 심리 상태를 유추해야 한다면, 글은 모든 게 가능하다. 영상물 처럼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들을 묘사할 수도 있고, 피상적인 마음만 표현할 수도 있으며, 깊고 음침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술할 수도 있고, 절제된 표현으로 단순하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세실의 심리를 너무 잘 표현했다. 아직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기 전의 심리 상태. 이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고, 저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는 유연한 브레인의 상태. 혼란스러워 하는 마음.

“… 오후마다 나는 이른바 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내 방에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는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요가책 한 권을 발견해 진지하게 그것에 열중했다. 때때로 혼자서 소리 죽여 미친듯이 킥킥거리기도 했다. 안이 내 웃음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한 구절 읽는데도 뭔가 생생했다. 왜 생생한 건진 모르겠다. 멋진 작가의 능력.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놀라웠는데, 작가인 사강이 이 소설을 썼던 당시 나이를 보고 납득했다. 17살이었나?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또 경외심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참~!


제목이 “슬픔이여 안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슬픔'이라는 개념을 곱씹어보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슬픔은 안이 삶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으로부터 나오는 죄책감같은 슬픔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신정철 님의 비평 글에서는,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다”라고 한다.

안의 세계와 아버지의 세계는 분명 대척점이지만 하나의 커다란 세계에 속해있다. 여기, 아니면 저기이다. 스펙트럼이 있을 수도 있다. 즐거움 추구 50%, 도덕적인 삶 50% 이렇게. 나는 슬픔이라는 제3의 세계가 또 다르게 또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낀다. 드넓은 바다 위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다. 슬픔은 하늘 위에 존재한다. 세상엔 다양한 세계가 있고, 화해할 수도 있지만 양립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슬픔인 것 같다.

슬픔을 추구하는 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 같다. 슬픔을 추구한다는 건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만 하라는 거 아닌가? 안정된 하나의 세계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게 얼마나 꿀잼인데.

책 자체는 길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기억할 것도 많지 않다. 심리 서술과 묘사가 풍부한 만큼 왜 인물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책의 두께 중 2/3만 소설이고 나머지는 사강 자신의 에세이, 사강의 사진, 옮긴이의 말, 비평가의 말이다. 이 책이 문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전혀 관심 없지만, 의미가 컸긴 했나 보다. 뭔가 심금을 울리는 게 있으니, 괜히 고전 명작은 아닌 것 같다. 재밌었다.